만약의 역사
중공군 참전은 열흘 사이에 두 번 뒤집혔다
1950년 10월 12일, 압록강 앞의 부대에 출동하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하루 만에 뒤집힌 그 열흘을 사료대로 정리했다.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은 한 번의 회의에서 결정되지 않았다. 1950년 10월 초부터 중순까지 열흘 남짓 사이에 중국 지도부는 파병 쪽으로 기울었다가, 10월 12일 출동을 멈추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 이튿날 다시 참전을 확정했다. 압록강을 건넌 것은 10월 19일 밤이다. 남아 있는 전보와 회의 기록은 이 결정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것이 아니라 며칠 단위로 흔들렸음을 보여 준다.
10월 초, 선은 이미 넘어져 있었다
중국이 결정을 서둘러야 했던 이유는 전선이 이미 북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0월 1일 국군 3사단이 38선을 넘었고,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 주력이 10월 7일 이후 뒤를 이었다. 같은 7일 유엔 총회는 한국 전역에 안정된 상태를 확보하기 위한 조치를 권고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경고는 그 전부터 나와 있었다. 9월 30일 저우언라이는 이웃 나라가 침략당하는 것을 좌시하지 않겠다고 공개 연설했고, 10월 2일 밤에서 3일 새벽 사이에는 베이징 주재 인도 대사 파니카를 불러 미군이 38선을 넘으면 중국이 개입한다는 뜻을 전했다. 이 경고는 워싱턴에 전달됐으나 협박으로 평가절하됐다.
같은 시기 두 방향의 요청이 베이징에 도착해 있었다. 10월 1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최소한 5~6개 사단을 38선 방면으로 보내 달라는 전보를 보냈고, 김일성과 박헌영도 같은 날짜로 원군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10월 2일자 전보가 두 개 남아 있다
이 열흘에서 가장 논쟁적인 사료는 10월 2일자로 남은 두 개의 전보 문본이다. 내용이 서로 반대다.
하나는 중국 측에서 공개된 마오쩌둥의 친필 원고다. 지원군 명의로 군대를 조선에 들여보내기로 했다는 내용이며, 12개 사단을 투입한다는 구상까지 적혀 있다. 다른 하나는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 문서고에서 나온 것으로, 베이징 주재 소련 대사 로신을 통해 전달된 문본이다. 여기서 마오쩌둥은 지금 파병하면 장비 열세와 미국과의 전면전 같은 심각한 결과를 부를 수 있다고 말하고, 신중론을 펴는 동지가 많아 아직 최종 결정이 아니라고 밝힌다.
해석은 갈린다. 선즈화를 비롯한 연구자들은 친필 원고가 발송되지 않은 초고이고 스탈린이 실제로 받은 것은 신중론 쪽 문본이라고 본다. 반대로 친필 원고를 마오쩌둥 개인의 판단이 담긴 실제 문서로 읽고, 두 문본의 차이를 마오쩌둥과 정치국 다수의 온도차로 설명하는 견해도 있다. 어느 쪽도 결정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
다만 양쪽이 공통으로 전제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 10월 초 중국 지도부 안에 합의가 서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엄호가 오지 않는다
결정을 흔든 변수는 소련 공군의 엄호였다. 10월 4일과 5일 베이징에서 정치국 확대회의가 열렸다. 시안에 있던 펑더화이가 4일 급히 호출돼 참석했고, 5일 회의에서 파병에 찬성했다.
10월 8일 마오쩌둥은 동북 지역 부대를 중국인민지원군으로 편성하는 명령을 내리고 펑더화이를 사령관 겸 정치위원에 임명했다. 같은 날 김일성에게도 통보가 갔다.
남은 문제가 공중 엄호였다. 저우언라이는 린뱌오와 함께 모스크바로 떠나, 흑해 연안의 별장에서 스탈린을 만났다. 회담 날짜는 10월 11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나 기록에 따라 하루 이틀 차이가 있다. 이 자리에서 스탈린은 소련 공군이 조선 상공에 나설 준비를 갖추려면 두 달가량이 필요하다는 뜻을 밝혔다. 기간과 범위는 전언마다 편차가 있으나, 지상군이 건널 시점에 엄호가 없다는 점은 같았다. 그날 두 사람 명의의 전보가 베이징으로 발송됐다.
12일의 정지, 13일의 번복
전보가 베이징에 닿은 10월 12일, 마오쩌둥은 펑더화이와 가오강에게 출동을 멈추라는 전보를 보냈다. 요지는 두 가지였다. 앞서 내린 출동 명령을 당분간 집행하지 말 것, 13병단 각 부대는 원래 자리에서 훈련을 계속하고 출동하지 말 것. 두 사람은 베이징으로 소환됐고, 모스크바의 저우언라이에게도 파병이 보류됐다는 뜻이 전해졌다.
이 상태는 하루를 넘기지 않았다. 10월 13일 다시 정치국 확대회의가 열렸고, 소련 공군의 엄호 없이도 참전한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그날 마오쩌둥이 저우언라이에게 보낸 전보에는 참전의 이익이 지극히 크고 참전하지 않을 때의 손해가 지극히 크다는 취지가 담겼다. 10월 18일 도하 시점이 확정됐고, 19일 밤 부대가 안둥(지금의 단둥)과 지안 등지에서 압록강을 건넜다. 같은 날 평양이 유엔군에 함락됐다. 첫 교전은 10월 25일 온정 부근에서 벌어졌고, 중국은 지금도 이 날짜를 참전 기념일로 삼는다. 소련 항공기는 11월 초부터 압록강 인근 상공에 나타났으나 활동 범위는 제한됐다.
이 열흘의 기록에서 눈에 띄는 것은 결정의 방향이 아니라 그 폭이다. 하루 만에 뒤집힌 명령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 명령이 뒤집히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12일과 13일 사이에 무엇이 판단을 되돌렸는지는 남은 전보만으로 온전히 복원되지 않는다.
이 사이트에서 연재한 『국경』은 13일의 재결정이 끝내 오지 않은 세계를 다룬 대체역사 소설이다. 12일의 정지 명령이 해제되지 않은 채로 남았을 때 한반도에 무엇이 남는지를 기록의 형식으로 따라간다.